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강 전투 (문단 편집) === 모든 것이 주류성으로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67.media.tumblr.com/tumblr_obwi1cKeHN1sqk8veo5_1280.png|width=100%]]}}}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Battle of Baekgang map.jpg|width=100%]]}}}|| 신라는 중심부가 공격당했음에도 오히려 반격의 기회로 삼아 주류성 공격을 준비하자, [[당고종]]도 이에 호응하여 추가 병력 파견을 준비한다. >663년 5월,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(右威衛將軍) 손인사(孫仁師)에게 병사 400,000명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. 그는 덕물도(德物島)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. >---- >'''《[[삼국사기]]》 권27 <[[문무왕]] 본기> 3년''' >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(淄)ㆍ청(靑)ㆍ내(萊)ㆍ해(海)의 병사 '''7,000명'''을 징발하고, 좌위위장군(左威衛將軍) 손인사(孫仁師)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. >---- >'''《[[삼국사기]]》 권28 <백제본기> 제6 의자왕''' 당나라가 4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<신라본기>의 기록은 <백제본기>와 사료 교차검증을 해 보면 [[호왈백만|호왈]] 40만으로 확인되며,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당나라 병력은 많아봐야 7,000~20,000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.[* 애초에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동원한 병력이 당 130,000명, 신라 50,000명이었으며, 당시에 13만 대군을 이끌었던 소정방과 손인사의 관직 차이를 보더라도 이 전투에 40만 대군이 동원되었을 가능성 및 손인사가 40만 대군을 이끌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.] 한편 신라는 [[김유신]]을 위시한 28명 혹은 30명에 달하는 장수들이 참가한, 사실상 신라의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출전했으며 8월 17일, 170척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온 당군과 합류해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였다. >무술(17일)에 적장(賊將)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. 대당(大唐)의 장군이 전선(戰船) 170척을 이끌고, 백촌강(白村江;하쿠스키노에)에 진을 쳤다. >---- >《[[일본서기]]》 권27 [[덴지 덴노]] [[http://contents.nahf.or.kr/item/item.do?levelId=ns.k_0041_0030_0050_0020|주유성이 포위되고 당의 군사들이 백촌강에 진을 침]] ---- >8월 17일 [[나당연합군|신당군]]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며 170여척의 당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식량을 하역한 후,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려는 적병, 즉 왜병을 대비하고 있었다.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서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다. >---- >'''[[노태돈]]. 《삼국통일사연구》 中''' 한편 [[8월 13일]], 부여풍이 기다리던 1,000척에 달하는 왜의 지원군이 도착해 백제부흥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. 이들은 주류성 밖에서 포진,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. 그리고 [[8월 17일]], [[나당연합군]]의 선봉대였던 신라 기병대가 왜선이 정박한 항구를 수호하던 [[백제]]의 정예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며 백강 전투가 시작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